최근 최경주 선수와 박세리 선수의 우승을 보면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최근 우리나라가 대단한 스포츠 선수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특히 예전에는 거의 불모지로 여겨왔던 골프, 피겨스케이팅, 수영 등에서 말이다. 하지만, 왜 이런 스포츠들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난데없이 그런 기라성 같은 '천재급' 선수들이 나타날 수 있는데 다른 스포츠들에서는 그렇지 못할까? 이런 의문에서 이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10년쯤 전 박세리 선수가 LPGA에서 돌풍을 일으킨 이후 지금의 LPGA는 한국선수들이 상위권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얼마전 최경주 선수가 '메이져급' 대회를 두 차례 우승했다. 불모지로 여겨졌던 피겨스케이팅과 수영에서도 김연아, 박태환이라는 걸출한 선수들이 나타나서 충격을 안겨주었다. 우리나라와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던 스포츠였던 골프, 피겨 스케이팅, 수영 등에서 이런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다. 척박한 풍토에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보물단지인 셈이다.
반면에 다른 스포츠들에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예를 들어, 축구에서는 그 대단한 박지성 선수도 아직은 세계정상이라 하기에는 살짝 모자란 감이 있고 우리 대표팀은 수비의 고질적인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고 창의적인 공격패턴을 못 보여 주고 있다. 야구에서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 4강에 들긴 했지만 실상 내용을 들여다 보면 제대로 외국투수의 공을 공략할 수 있었던 타자는 이승엽과 이종범 두사람에 불과했다. 테니스에서는 이형택이 단식 세계랭킹 100위권에 들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이긴 하지만 박세리,김연아,박태환 레벨의 성취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왜 어떤 스포츠에서는 우리나라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듯한 세계 최정상급의 선수들이 나타날 수 있었고 다른 스포츠에서는 그럴수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일단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골프,피겨,수영은 개인종목이라는 점이다. 축구, 야구 등의 팀경기와는 달리 어떤 한 사람이 뛰어나면 당장 효과가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대로 된 답은 아니라 생각된다. 왜냐면, 첫째는 개인종목인 테니스 등에서는 아직 그런 레벨의 선수가 안 나왔다는 점이고 둘째는 축구 야구 등에서 그런 레벨의 선수가 아직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뭔가 다른 요인이 있다는 얘기다.
내가 생각하기에 골프,피겨,수영의 공통점이면서 야구,축구,테니스 등과 다른 점은 상대방과 하는 경기가 아니라 자신만이 홀로 하는 개인종목이라는 점이다. 물론 수영에서도 상대의 페이스에 따라 내 페이스도 조절해야 하고 골프에서도 상대방의 타수에 따라 얼마나 공격적으로 접근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지만, 야구, 축구, 테니스처럼 상대방에 맞서서 경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골프,피겨,수영 등의 종목에서는 선수가 재능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경제력이 되어서 좋은 코치의 지도를 받아 열심히 연습하면 충분히 성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아주 크다. 하지만, 야구, 축구, 테니스의 경우는 다르다. 월드클래식베이스볼에서 보았듯이 외국투수들의 공을 한 번도 제대로 만나본적이 없는 경우에는 공략이 불가능하다. 축구에서도 창의적인 패스를 많이 안 당해 본 수비진들은 그런 패스를 막을 준비가 부족할 수 밖에 없고 강력한 수비를 많이 경험해 보지 못한 공격진들은 그것을 뚫을만한 전술을 경험할 기회가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이형택도 더 젊어서 기량이 더 쉽게 향상될 수 있었을때 대단한 외국선수들과 경기할 기회가 더 많았더라면 지금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냈을 가능성이 많다. 야구, 축구, 테니스 등의 경우에는 아무리 선수가 훌륭하고 지원을 잘 해주고 코치가 훌륭해도, 자신이 연습이나 경기를 해 본 상대방의 기량에 따라 자신의 기량이 상당히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구,축구,테니스 등의 경우에는 단기처방이 별 소용이 없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선수 한두 명과 경제력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얘기다. 이 종목들에서는 우리나라에 뛰어난 선수들의 저변이 확대되어 서로 경기하면서 기량이 향상될 수 있는 레벨이 되지 않고서는 절대 대단한 성적이 나올 수 없다. 단기적인 투자만으로는 효과보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너클볼 던지는 투수를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 타자가 어떻게 너클볼을 공략할 수가 있겠는가? 너클볼을 공략할 수 있는 타자들을 원하면 너클볼을 던질 수 있는 투수부터 키워야 하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단기적으로는 좋은 성적이 가능하긴 하다. 월드컵때 미친듯이 체력훈련 하고 몇달동안 합숙훈련시켜 팀웍맞춰놓는 방법을 썼고,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는 변칙적인 투수로테이션을 써서 4강에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두번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계속 이렇게 해서는 안 통한다. 일본과의 세번째 경기에서는 그전 경기들에서 이미 노출되어버린 우리 투수진이 난타당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장기투자와 저변확대가 필수적인 종목들에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것인가? 문제는, 우리나라가 장기적인 투자를 통해 전반적으로 선수 질을 높이고 저변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익숙치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고교야구팀은 수천개인데 우리나라는 겨우 수십개에 불과하면서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두번이나 일본을 이겼다. 역시 우리 민족은 우수해" 하는 식으로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자기위안을 한다. 하지만 정작 고교야구를 어떻게 활성화할지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다. 대통령배 야구에서 서울고 이형종 투수가 이틀연속 100개가 넘는 공을 던진 것에 대해서 '눈물의 역투' 어쩌고 환호하면서도 정작 저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것은 우리가 약소국일때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서 매우 유용한 구호였겠지만, 차근차근 장기적으로 준비해 나가서 어려운 여건을 만날 가능성 자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경시하게 하는 도구로 쓰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그런 약소국 마인드를 가지고 '주체혁신 분기탱천'을 최고의 문제해결방식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나라의 엘리트체육은 운동선수가 운동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운동선수는 수업이고 공부고 다 집어치우고 오직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운동만 한다. 이렇게 운동선수들을 모 아니면 도 상황으로 몰고가는 풍토에서는 고교야구의 저변 확대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하면 인생 종친다는데 거기에 배팅할 간 큰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미국에서처럼 IEEE의 최우수 논문상을 몇번씩 받았던, Purdue대학의 전기컴퓨터공학부의 학부장(Mark J. Smith)이 알고보니 미국 펜싱 챔피언을 몇번씩 하고 올림픽 대표로도 출전했고 그래서 조지아공대교수 시절에 성화봉송주자였다더라 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우리의 약점들이 단지 스포츠에서의 문제가 아니고 전반적인 사회 풍토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신용카드 마구 만들어 주고 운하 파는 식의 단기처방으로 경제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람들, 경제성장률 8% 어쩌고 하면서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잠재성장률을 훨씬 웃도는 성장을 하겠다는 떠들어 내는 사람들, 뒷수습은 생각 안하고 일단 일 저지르고 보는 사람들을 '일 잘한다'고 생각하는 마인드, 시스템을 구축하기보다는 '천재가 ***명을 먹여 살린다' 어쩌고 하면서 개인 혹은 소수에게 몰빵하려는 마인드, 이런 것들이 아직도 우리가 약소국식 한탕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증거이다. 이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시스템'이다. 이제는 한탕주의에서 벗어나서 시스템을 어떻게 차근차근 구축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인 것이다.
ps. '시스템'에 대해서는 참 할 말이 많은데 나중으로 미룬다.
'세상사횡설수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명박을 꼭 찍어 주세요, 여러부~운! (46) | 2007/10/11 |
|---|---|
| 미국의 반미 대통령 선입견, 답답한 교민사회, xxx의 닭짓... (0) | 2007/10/03 |
| 학벌주의 위선자들 (2) | 2007/08/27 |
| 공유기 제한이 반드시 말이 안 된다고는... (24) | 2007/08/01 |
| 무사히 잘 해결되었으면... (0) | 2007/07/25 |
| 최경주, 박세리, 김연아, 박태환... 훌륭하다. 하지만, 문제는 시스템이다. (2) | 2007/07/17 |
| 우리나라는 대통령제 국가가 아니었다? (6) | 2007/06/27 |
| 선거는 정치를 대체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일부분일 뿐이지. (3) | 2007/06/21 |
| 이런 미친놈이 나올줄 알았다. -.-;; (4) | 2007/05/23 |
| 기술유출? 기사 제대로 써라. (63) | 2007/05/20 |
| 국방부 제주에 전투기 대대 배치? (4) | 2007/05/08 |
트랙백 주소 :: http://rainyvale.puppynbunny.com/trackback/132
-
Subject: 김연아, 아사다 마오, 일본 스포츠
Tracked from interlude 4th 2007/11/26 17:21 삭제어제 녹화방송으로 김연아 선수의 2007 그랑프리 5차전 러시아 경기를 봤습니다. 생방으로 보고 싶었지만 일본에서도 이렇다 할 주력선수가 안 나와서 그런지 TV에서 당일에 안 해 주더군요. 이미 우승했다는 거 알고 보는 피겨도 나름 나쁘지 않습니다. 생방으로 봐 버리면 라이벌 선수에게 '넘어져라 독전파 '를 날리기 바쁜지라 (주로 아사다 마오) 경기를 순수한 마음으로 관전할 수 없거든요. 특히나 마눌님은 심장에 안 좋다고 일부러 화면에서 고개..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이올린에 추천하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예리한 분석이십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우리나라는 시스템 보다는 개인기에 의존한 경험이 더 많은 것 같더라구요.
시스템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넘 기대는 마세요. 기약없는 약속일 수도 있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