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 때 지도교수가 며칠전 근처 학회에 와서 실험실 동창회 모임을 했다.
그 분이 식당에 들어서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멀리서 손만 흔들며 '하이' 하더니
나를 발견하고서는 내게 다가와서 한참을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역시 애제자이다 보니... ㅋㅋㅋ (이렇게 나름 착각하고 산다.)

이 분은 영상처리에서 가장 권위있다 할 수 있는 저널의 현재 편집장이니
그 능력을 상당히 인정받는 분이라 할 수 있겠는데...

나는 이 분의 첫번째 본격적인 한국 출신 제자에 해당하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공부를 막 시작했을 무렵에 이 분은 한국 학생들 사이에 평판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내가 이 분에게서 연구조교(RA) 제의를 받고서 여러 선배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만장일치로 "그 사람 괴팍해. 어지간하면 하지 말아라."는 답을 들었을 정도이다.
실제로 같이 지내 보니, 시간 약속 잘 안 지키고, -.-;;
시간관리 잘 못하고, -.-;; [각주:1]
논리가 개입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기억력이 좀 나쁘고, -.-;;[각주:2]
'똑똑한' 사람들의 거의 공통적인 단점인, 자기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해서
자신이 이해못하는 일은 모두 틀린 것이라 생각하는 등의 문제가 있긴 했는데... [각주:3]
이런 소소한 단점들이 있긴 하지만, 그거야 원래 똑똑한 사람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동전의 양면인 것 같고...

아뭏든 나에게는 입학 때부터 지금까지 너무나도 좋은 선생이었고 후견인이 되어 주었었다.

연구조교 제의를 주면서 인터뷰를 처음 했을 때 내 석사논문에 대한 질문에 답을 엉망으로 했는데도
계속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 주었고...
처음 1년 동안은 연구에 별다른 진척이 없었던 것 같은데도
원래 학생이란 그런 것이라며 여유를 갖(고 계속 놀)도록 해 주었고...
미팅 때에는 내가 이해를 잘 못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실망하거나 꾸짖지 않고
"그래서 선생이 필요한 거지" 라면서 미팅 시간 내내 강의처럼 설명해 주고...
주중에는 집중해서 보기가 어렵다며 주말에 학교에 나와서 컴퓨터 앞에 같이 앉아서
내 논문을 함께 들여다 보며 논문쓰기 1:1 첨삭지도를 수없이 해 주었고...
내가 다른 펀딩소스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유학생활에는 돈이 많이 든다며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월급을 주었고...
유명한 외부 기관에서 세미나 요청들이 왔을 때 경험을 쌓으라며 내가 대신 가도록 해 주었고 ...[각주:4]
저널들에게서 논문 심사 요청을 받으면,
다른 교수들처럼 학생들에게 심사 초고를 써오게 하고 자기가 검토해서 내보내는 방식 대신에
나를 편집진에게 "얘 한 번 시켜봐. 똘똘한 게 쓸만해."라고 직접 소개하여 내 이름을 걸고 심사를 하도록 해서
학문사회에서 필요한 경험들을 쌓도록 해 주었고...
내가 발표가 없는 학회인데도 내가 단순히 그 분야에 관심이 있어 한 번 가 보고 싶다 했더니 비용을 다 대주며 보내 주고...
처음 캘리포니아에 학회 왔을때는 하루 정도는 자기가 호텔비를 더 대 줄 테니 좀 돌아다니고 놀다 오라 했고...
결혼식 때는 거의 두 달을 한국에 가 있는다 했더니
노트북 컴퓨터[각주:5]를 한 대 사주면서 가서 시간나면 일 좀 하라 했었는데
다녀 온 후에 "바빠서 그동안 일 하나도 못 했다" 했더니
그럴 줄 원래 알았었다며 앞으로는 집에서 일 할 필요가 더 많은 터이니
(졸업후엔 반납해야 하지만) 노트북은 결혼선물이라 생각하라면서 웃었고...
내 결혼 후에 언젠가는 혹시 돈이 더 필요하면 자신이 special allowance(특별수당?)를 마련해 줄 수 있다며
내게 경제형편이 어떠한지 물어보기도 했고...
졸업 1년쯤 전에는 취직 인터뷰 하러 다니려면 영어가 중요하다며
(내가 워낙 영어를 못해서인지 ^^) 영어 단기 집중 코스를 듣도록 주선해 주고 비용도 모두 내 주고...
졸업 무렵에는 국립연구소에 포스트닥 연구원 일자리를 하나 만들어 주고
평균보다 훨씬 좋은 연봉까지 미리 다 협상해서 물어다 주기도 했고... [각주:6]
작년 11월 시카고에서 열린 RSNA에 왔을 때도 나를 찾아서 우리 회사 부쓰에 여러 번 다녀갔었다...

어떤 친구는 지도교수 잘못 만나 말 그대로 폐인처럼 되어 버린 경우도 있는데, -.-;;
나는 지금까지 지도교수는 모두 좋은 분을 만나는 복을 누렸다.
좋은 인연이 끝까지 좋은 인연으로 남았으면 좋겠는데...


  1. 약속을 잡아 놓고서도 그걸 잊어 버리고 다른 데 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걸 내가 찾아서 체포(?)하여 교수 오피스로 간다 하더라도, 가는 중간에 다른 교수들 오피스로 자꾸 들어가서 몇십 분씩 잡담하다가 시간이 다 지나 버려 결국 나와의 미팅은 취소... 이런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었다. 성공하려면 원래 시간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데, 도무지 이 분은... [본문으로]
  2. 나도 마찬가지... -.-;; [본문으로]
  3. 이게 별 큰 문제 아닌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굉장히 큰 문제였었다. 내 박사논문의 핵심 아이디어 중 하나가 사실은 애초에 결함이 있었는데, 그 분은 그 아이디어가 그럴듯하고 결함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나중에 내가 보여준 실패한 실험결과들을 실험의 오류라고만 생각하고서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다시 열심히 실험해 보라고 나를 다그치려고만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디어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와 그 해결책을 나중에 찾아내고서도 그것을 그에게 납득시키는 데 꼬박 반년을 허비했다. [본문으로]
  4.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때 나의 수준은 초청한 기관의 호의에 상응할 만한 수준이 전혀 아니었으니... 이런 건 본받으면 안 된다. -.-;; 원래는 씨니어 포스트닥이 있으면 보내달라 했다는데, 우리랩은 포스트닥은 원래 안 키우기 때문에 그냥 박사 중년차인 나를 보냈다. 그래서, 연구를 일단 중단하고 세미나 자료 만들고 원고 만들고 연습하는데 거의 한달을 보냈다. [본문으로]
  5. 거금 2500불짜리였다. 모니터와 사운드가 엄청나게 좋은, 엔터테인먼트용(!)이나 다름 없는 노트북이었는데... ^^ 아예 노트북 배낭과 서류가방까지 세트로 사주셨다. 원래 파워북을 사라고 자꾸 종용하는 걸 뿌리치느라 힘들었다. [본문으로]
  6. 그런데 지금의 회사로 오기로 해서 그곳은 거절하느라 좀 미안했는데, 선뜻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네가 잘 결정한거다"라며 개의치 않는 척 해 주셔서 참 고마웠다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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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isanghee 2008/02/01 1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레베님의 인복이지요..^^

  2. 엉엉 산도(깨비)발.. 2008/02/01 17: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지도교수인 나같은 사람은 어쩌라는 것이야?? 근데 1,2,3 모두 우리 지도교수에게도 해당되는 거 같은데.. 우리교수도 시간약속을 잘 못지키고,기억력이 무지 나쁘고,아무리 새로운 얘기를 해도 자기가 알고 있는 틀에 맞춰서 나머지는 다 잘라내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는.좋은 점은 뭐가 있을까나. 교육학을 공부하는 거 치곤, 첨부터 펀딩을 잘 줬고, 올해도 해프타임 알에이 하면서도 장학금을 따로 줬다는 정도일까? 나랑 만나서는 넌 멀었다며 개쪽을 허구헌날 주면서, 다른 교수들한테는 은근히 칭찬을 늘어놓는...지새끼 욕 나가서는 안하는 훌륭한 인격을 보여주는 정도... 이 정도일까? 우리 교수에 대한 불만은 뭐냐하면 사람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지. 이랬다 저랬다 난리거덩. 어쩔때는 갑자기 나이스해지기도 하고, 어쩔때는 갑자기 심술을 부리면서 계속 화를 내기도 하고..뭐 그렇다는.
    아니 근데 엊그제 깨달았는데, 나도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이며 페이퍼를 볼때 찾아내는 장단점이 모두 우리교수를 닮았더라..하는 것이지 나도 리틀 도깨비발이 되가고 있나봐.

    • BlogIcon Rainyvale 2008/02/02 1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리 두 지도교수는 그 세가지 측면에다가 경제적인 도움을 잘 주는 편이라는 점에서 아무리 봐도 여러모로 너무 닮았다는... ^^ 근데 내 지도교수는 나랑은 만나서도 항상 나이스한 편이었다는 게 좀 다른 것 같고...
      아무래도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지. 박사 하나 키워내는게 어찌 보면 자기의 학문적 분신을 하나 태어나게 하는것과 좀 비슷한 듯 해.

  3. BlogIcon CeeKay 2008/02/04 0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학생활에서 지도교수 잘 만난다는 것 정말 축복이죠. 그런 면에서는 저도 좋은 지도교수를 만나 것에 감사합니다. 은퇴까지 하셨는데 아직도 저같은 혹(?)달고 있어서 귀찮으실텐데도 싫은 내색 안하시고 여러모로 신경써 주시는...
    앞으로도 Rainyvale님의 생활 모든 분야에서 늘 좋은 만남이 있기를 바랍니다.

    • BlogIcon Rainyvale 2008/02/05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CK님의 인복이지죠.. ^^
      (isanghee 님의 댓글을 좀 훔쳐 썼습니다. ㅋㅋ)
      CK님도 계속 인복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4. BlogIcon Ikarus 2008/05/12 2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훌륭한 지도교수를 만나셨다니 부러울 따름입니다. 제 분야는 워낙 펀드가 적어서 그래도 개중 가장 돈 많은 교수를 만나서 다행이라 여겼었는데 사무적이고 학생과 자신을 고용관계로 보는 교수때문에 결국엔 질려 버렸다는... 그 여파로 지금도 프랑스 사람이라면 일단은 경계하는 버릇이 생겼답니다.(지도 교수가 프랑스 사람이었거든요, 일반화의 오류인 걸 알지만 막상 겪고 나니 어쩔 수 없더군요 :(

    • BlogIcon Rainyvale 2008/05/13 1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특정 지역 출신의 특성 성별 교수들이 모두 성격이 독특해서 학생들의 기피 대상이 되었었는데요... (신기하게도 아내의 지금 학교에서도 좀 그렇더군요.) 그런 게 성급한 일반화라는 건 이성적으로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자신의 경험이 그런 이성보다 앞서 작동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인간의 본성인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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