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나 기말리포트 등의 논리적인 글을 쓰는 것은 설사 한글로 쓰는 것도 참 힘든 일인데,
특히나 영작은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내는 특히나 인문사회계열을 공부중이라
요구되는 글쓰기 수준이 매우 높아 자주 괴로워하는데,
내가 (비록 그런 수준을 요구하지 않는 이공계 전공이지만)
그래도 몇 년 먼저 공부했던 '짬밥'이 있는지라
가끔씩 교정도 해 주고 논리흐름도 체크해 주곤 했는데...
아내의 영작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자주 하는 얘기가 무엇이었느냐면,
"이 글의 문제는 영어가 아니야." 이다.
영어로 글을 쓰다 제대로 쓰여지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애꿎은 영어실력을 탓하는 경향이 많고
예전의 나도, 몇 년 전의 아내도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었는데... -.-;;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한국사람들이 영작을 할 때 더 자주 나타나는 문제점은 '영'이 아니라 '작'이다.
영어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성과 논리의 문제가 더 우선이라는 얘기다. 1
특히, 영작 경험이 거의 없을 때는 영어의 문제가 크겠지만,
경험이 좀 쌓이다 보면 영어의 비중보다는 작문의 비중이 훨씬 커진다.
한글로 글을 쓸때는 논리가 엉망인데도 적당히 사기(!?)를 쳐서
비논리를 논리인 척 슬쩍 넘어갈 수 있는데,
익숙치 않은 영어로 쓸 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을 자꾸 "영어로 써서 글이 안 써진다"고 착각하면서 흔히들 영어실력 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익숙치 않은 영어로 글을 쓰려면 모국어인 한글로 쓸 때보다 구성과 흐름의 중요성이 훨씬 높아지는 것이다.
게다가 영어는 나름의 글쓰기 방식이 있다.
영작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의 영작을 읽어 보면 영문법의 불완전과 어휘의 불충분도 문제이지만
글쓰기 방식이 미국식으로 쓰여져 있지 않는 것이 이해가 어려운 더 큰 이유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우리는 두괄식, 미괄식, 양괄식 등 다양한 논리전개가 있지만,
미국 애들은 단순무식해서 두괄식 외의 논리전개 방식을 싫어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을 찔러서 주제문을 정성들여서 예술 수준으로(!) 써서 보여 주고
논리 전개를 해 나가야 한다.2
어떤 사람이 이런 구조에 익숙치 않아 어떤 문단의 첫 문장을 주제문으로 쓰지 않았다면
문단 내에서 주제문과 그 근거 문장들의 통상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게 되어 버리기 때문에,
독자는 첫 문장이 당연히 주제문이라 오해하고 뒷부분까지 그 주제문에 억지로 맞춰서 생각하려 애쓰거나
억지논리처럼 보이는 문단에 실망하면서 최악의 경우에는 글을 읽기를 포기하게 된다.
영어 뿐만 아니라 다른 작문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익숙치 않은 언어로는 '사기'를 치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영작할 때는 논리전개에 보다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면, 무슨 내용을 병렬구조로 나열해서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무슨 내용을 순차구조로 배열해서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를 잘 구상해야 하고,
실제 글을 쓸 때는 글의 흐름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독자들에게 충분한 힌트를 주어 가며 전개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특히 병렬구조라면 병렬된 문장/문단구조나 내용이나 분량이 가급적이면 비슷하도록 해야 하고,
미국인들은 3을 좋아하니 -.-;; 보통 세가지를 병렬시키는 것이 무난하고...
가급적이면 단순하게 써야 하고,
뒤 문장을 읽고 나면 앞 문장까지의 내용에서 그 문장이 예측가능하도록 써야 한다.
영작을 잘 하려면 쓰고 나서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고 또 고치고 또 고치고 또 고치고 골백번 고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 논리와 전개를 가다듬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제 아무리 완벽한 영문법을 하고 제 아무리 완벽한 한글 작문을 한다 해도
영어 작문 실력은 늘기 어렵다.
요새는 소소한 영문법 교정이나 문장을 좀 매끄럽게 다듬어주는
'편집' (editing) 서비스들이 온라인 등에서 (유료로) 제공되고 있다.
즉,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사람들의 사소한 실수들은
(돈만 어느정도 쓰면) 커버해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제 관건은 그런 서비스가 커버해 줄 수 있는 사소한 실수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서비스가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부분,
즉 구성과 논리를 잘 가다듬고 그것을 영어식 논리전개와 글쓰기 방법으로 표현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요새 우리 나라 영어 교육 시스템을 확 뒤집어 엎을 계획을 짜나 본데...
내가 영어영문학에는 문외한이긴 하지만
(어차피 영작 공부를 시킨다는 전제 하에서) 주제넘게 제안을 하자면,
영작 공부 시킨답시고 새로 배운 구문(예: so that 구문) 연습이나 시키고
쓴 문장이 자꾸 문법에 맞나 틀리나만 문장 단위로 따지러 들지 말고,
미국사람들의 생각하는 스타일과 글쓰는 스타일을 소개해 주고
논리와 구성을 문단 또는 글 전체 단위에서 가다듬는 방법을 좀 훈련시키라는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꼴통 YS옹의 명언을 좀 빌자면,
문법교정하는 머리는 (이제 문명의 발달 덕에 쉽게) 빌릴 수 있어도,
논리전개하는 머리는 빌릴 수 없쟎냐.
관련글:
2006/08/24 - 논문 잘 쓰는 법...
2007/10/13 - 논문 잘 쓰는 법 2
ps 1.
지엽적인 것보다 전체적인 논리전개가 중요하다는 윗글의 요지와 연관지어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땅박님이 맞춤법 틀린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맞춤법이야 세월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세세한 것들은 가끔씩 혼동하기 쉬운 것이니
평소 제정신 박힌 소리보다는 헛소리가 더 자주 나올 정도로 연로하신 분이
그 정도 틀린 거야 충분히 이해할만하며
그걸 트집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이외수 선생처럼 소설가도 아니고 말이다.)
내가 이 양반에게서 정말 이해를 못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의 '모순어법'이다.
그의 신비스러운 논리구조에 대한 탁월한 정리는
BLUE'nLIVE :: 이명박 아저씨의 모순어법(oxymoron) 강좌 - 고급편을 보시라.
ps 2.
나도 영작 잘 하는 건 아닌데... 이런 글을 쓰니 좀 쑥스러운... -.-;;
------- < 각주 > -------------------------------------
- 물론 언어라는 사고의 '도구'가 거꾸로 사고 자체를 규정하는 측면도 있어서 영어의 불편함 때문에 논리적 사고에 지장을 받는 면도 있긴 하다. 게다가, 한글로 논리적으로 썼다고 해서 그걸 영어로 옮겨 놓으면 논리적인 영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내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옳은 주장이다. 하지만, 어느정도 영작 경험이 생기면 영어보다는 작문의 문제가 훨씬 중요해진다. [본문으로]
- 내 생각엔 이게 좀 웃기는 건데... 논리의 흐름을 따라간다면 당연히 미괄식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논리적 흐름을 역행하는 이런 구조를 따라 가면서도 논리적인 듯 보이게 주제문을 쓰고 논리전개해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여간 미국 애들은 그렇다 하니 그냥 맞춰 주는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싸이언스키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소고기 수입과 광우병, 이건 과학만의 영역이 아니다. (8) | 2008/05/12 |
|---|---|
| 특특과학고가 곧 필요하겠군. (4) | 2008/04/30 |
| 성화 봉송 주자로 뛰었던 올림픽 선수 경력의 교수 (4) | 2008/04/09 |
|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비밀 - 프리코그의 생각을 어떻게 읽어 들이는가? (8) | 2008/03/08 |
| 영상처리 전공자를 위한 추천 교양(?)과목 3 - 수치해석 (2) | 2008/02/17 |
| 영작, '영'이 아니라 '작'이 문제다. (4) | 2008/02/05 |
| 디지탈 포토그래피 동영상 강의 모음 (구글 세미나 시리즈) (0) | 2008/02/01 |
| 내 유학생활 지도교수 (8) | 2008/01/31 |
| 한영/영한 번역기를 인수위에게!!! (0) | 2008/01/31 |
| 영상처리 전공자를 위한 추천 교양(?)과목 2 - 실해석학 (2) | 2008/01/25 |
| 영상처리 전공자를 위한 추천 교양(?)과목 - 알고리즘 (2) | 2008/01/24 |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이올린에 추천하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구구절절이 옳으신 말씀입니다.
어차피 영어정책은 영어교육보다는 경제활성화에 맞춰진거라
그 정책을 영어교육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일입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붕어빵'도 무럭무럭 잘 자랐으면 합니다. ^^
그렇죠. 영어보다는 논리적인 '만들기'가 중요한 일이죠. 그것을 잘 못해서 지금 저는 고생중이고...ㅠ.ㅠ 차근차근 훈련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훈련해야 하는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영어이건 한글이건간에 그 훈련을 죽을때까지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피곤한 직업을 고른 죄이지요. ^^